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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흥과 지혜가 깃든 한국의 명절놀이: 그네뛰기, 널뛰기, 더위팔기, 씨름의 재발견
    한국민속학 2025. 5. 22. 18:35

    목차

    # 그네뛰기: 하늘로 솟아오른 여인의 꿈과 역사의 흔적

    # 널뛰기: 담장 넘어 자유를 꿈꾼 여인들의 춤

    # 더위팔기: 지혜로운 선조들의 여름나기 비법과 주술적 염원

    # 씨름: 민족의 힘과 단결을 상징하는 역동의 스포츠

    흥과 지혜가 깃든 한국의 명절놀이: 그네뛰기, 널뛰기, 더위팔기, 씨름의 재발견
    흥과 지혜가 깃든 한국의 명절놀이: 그네뛰기, 널뛰기, 더위팔기, 씨름의 재발견

     

    그네뛰기: 하늘로 솟아오른 여인의 꿈과 역사의 흔적

    그네뛰기는 '추천(秋韆)'이라는 한자 표기에서도 알 수 있듯이, 길게 늘어뜨린 두 동아줄 끝에 매달린 발판(널빤지)에 올라서서 앞뒤로 흔들며 노는 역동적인 민속놀이입니다. 전국 각지에서 '근데', '군데', '근의', '군의', '그리', '구리' 등 다양한 방언으로 불리며 지역적 특색을 담아왔습니다. 특히 음력 5월 5일 단오의 대표적인 놀이로, 남성 중심의 씨름과 대비되는 여성들의 상징적인 놀이로 자리매김해 왔습니다. 푸른 녹음이 짙어지는 단오, 화려한 색동 한복을 입은 여인들이 그네에 올라 몸을 날려 하늘로 솟아오르고, 다시 땅으로 내려올 때 느껴지는 아찔한 긴장감은 보는 이들에게도 짜릿한 매력을 선사했습니다. 이는 단순한 놀이를 넘어, 당시 여성들이 경험하기 어려웠던 공간적, 신체적 자유를 만끽하는 특별한 해방구와도 같았습니다.

    그네뛰기의 기원은 중국 북방 민족의 풍습에서 시작되어 중국을 거쳐 한국으로 전파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고려 시대에 이르러 비로소 국내 문헌에 그네뛰기 기록이 등장하는데, 당시에는 주로 귀족층에서 즐기던 호화로운 여흥이었습니다. 하지만 조선 시대에 들어서면서 그네뛰기는 궁중의 제한된 공간을 벗어나 점차 일반 대중에게 보급되었고, 특히 단오를 대표하는 민속놀이로 확고히 자리 잡게 됩니다. 흥미로운 점은, 고려 시대와 달리 조선 시대에는 상류층 여인들의 그네뛰기가 엄격하게 통제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는 봉건적인 유교 윤리가 여성의 활동을 제약했던 당시 사회상을 반영하는 것으로 보이며, 그 결과 그네뛰기는 주로 서민층의 젊은 여성들 사이에서 널리 행해지게 되었습니다. 시대의 변화와 함께 한국 민속학 속 민속놀이의 양상도 달라진 것이죠.

    그러나 1900년대 초 격변기와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그네뛰기는 다른 전통 놀이와 마찬가지로 점차 설 자리를 잃었고, 민족의식 말살 정책으로 인해 한때 그 자취를 감추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해방 후 민족문화의 부활과 함께 그네뛰기는 다시 활기를 되찾았고, 현재는 행정당국의 민속 문화 재현 사업의 일환으로 전국 각지에서 단오를 비롯한 다양한 행사에서 명맥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단순히 재미를 넘어 그네뛰기에는 선조들의 지혜가 담겨있습니다. 옛말에 그네를 뛰면 여름철 모기 등 곤충에게 물리지 않고 더위도 타지 않는다는 속설이 전해져 내려옵니다. 강릉 지방의 한 선비가 밤마다 날벌레에 시달리다가 그네를 만들어 타고 쫓아냈다는 이야기는 이러한 믿음의 한 단면을 보여줍니다. 이는 그네뛰기가 단순히 놀이를 넘어, 자연의 어려움을 극복하려는 옛사람들의 생활 지혜와 염원이 담겨있음을 시사합니다.

    그네뛰기는 크게 외줄 그네뛰기, 외 그네뛰기, 쌍 그네뛰기 세 가지 형태로 나뉩니다. 외줄 그네뛰기는 나뭇가지에 하나의 줄을 매달아 남성 혼자 타고, 얼마나 많이 빙글빙글 도는지를 겨루는 힘 자랑 놀이입니다. 힘이 센 사람이 뒤에서 밀어주어 더욱 큰 회전을 유도하며 남성적 기량을 뽐냈습니다. 외 그네뛰기는 혼자 그네에 앉거나 서서 타는 일반적인 형태로, 몸의 탄력을 이용해 최대한 높이 날아오르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나뭇잎을 따거나 누가 더 높이 오르는지를 눈짐작으로 겨루며 승패를 가르기도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쌍 그네뛰기는 두 사람이 함께 타는 형태입니다. 한 사람은 서고 다른 한 사람은 앉거나, 두 사람 모두 서서 타기도 합니다. 두 사람이 힘을 합쳐 교대로 그네를 구르면 더욱 힘차게 높이 솟아오르는데, 이는 협동의 미덕을 보여주는 놀이 방식이기도 합니다. 이처럼 그네뛰기는 단순한 놀이를 넘어, 각 시대의 사회상과 성 역할, 그리고 자연과의 조화를 추구했던 우리 선조들의 삶의 지혜와 염원이 담겨 있는 소중한 문화유산입니다.


    널뛰기: 담장 넘어 자유를 꿈꾼 여인들의 춤

    널뛰기는 길고 두꺼운 널빤지의 중앙을 짚단이나 가마니로 괴어 놓고, 양쪽 끝에 한 사람씩 올라서서 번갈아 구르는 힘으로 반대편 사람이 솟아오르고 내려오는 동작을 반복하는 한국 민속학 속 민속놀이입니다. '축 판의(蹴板戲)', '초판의(超板戲)', '도판의(跳板戲)', '판무(板舞)' 등 다양한 한자 표기에서도 알 수 있듯이, 널빤지 위에서 발을 구르고 뛰어오르는 역동적인 움직임이 특징입니다. 널뛰기는 주로 남성들보다는 여성들, 특히 부녀자들이 즐겨 하던 놀이로, 음력 정월 초순, 정월 대보름, 그리고 8월 한가위 등 명절에 대규모로 이루어졌습니다. 이는 당시 엄격했던 봉건 사회에서 여성들이 바깥출입이 자유롭지 못했던 상황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담장 밖으로 몸을 솟구쳐 오르며 세상 구경을 할 수 있었던 널뛰기는 답답한 일상에서 벗어나 자유를 갈망했던 여인들에게 특별한 의미를 지녔습니다.

    널뛰기하기 위해서는 넓은 마당에 멍석을 깔고 그 위에 널빤지를 놓습니다. 널빤지의 양 끝에는 두 사람씩 올라서는데, 이때 몸무게가 비슷한 사람끼리 뛰는 것이 가장 효율적입니다. 만약 몸무게 차이가 날 경우, 가벼운 사람 쪽으로 널을 밀어주는 것을 '밥 준다'고 표현합니다. 널이 안정적으로 움직이도록 널 한가운데에 한 사람이 앉아 뛰는 것을 돕기도 합니다. 먼저 뛰는 사람이 뛰어올랐다가 내려오면서 널을 밟으면, 그 반동으로 상대편 사람이 높이 솟아오릅니다. 널뛰기에 익숙해지면 공중에서 발을 앞뒤로 또는 좌우로 벌리는 고난도의 기술을 선보이기도 합니다. 이때 "밥상 들어간다, 문 열어라." 하면 상대편은 "문 열었다, 들어와라." 하며 발을 벌리는 등 재치 있는 대화를 주고받으며 흥을 돋우는 것이 널뛰기의 또 다른 묘미입니다. 발을 잘못 디뎌 떨어지는 사람이 생기면 그 자리에서 물러나고 다른 사람이 널에 올라와 널뛰기를 이어갑니다.

    널뛰기는 주로 새해 아침 차례를 지낸 후, 곱게 차려입은 부녀자들이 넓은 마당에 모여 함께 즐기던 놀이였습니다. 처음에는 무서워 빨랫줄을 잡고 뛰기도 하지만, 점차 익숙해지면서 구르는 힘이 세지고 여유가 생기면 공중에서 발을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경지에 이릅니다. 특히 처녀들이 즐겨 하던 놀이로, 이들은 새해맞이 널뛰기를 위해 몇 달 전부터 머리를 길러 예쁜 댕기를 땋고 빨간 치마와 노란 저고리를 곱게 차려입었습니다. 널뛰기는 단순한 신체 활동을 넘어, 여성들이 사회적 제약을 잠시나마 벗어나 자유로움을 만끽하고, 서로 소통하며 유대감을 형성하는 중요한 창구였습니다. 이는 명절이라는 특별한 시간에 여성들이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고, 공동체 안에서 함께 즐거움을 나누는 문화적 의미를 지녔습니다.

    널뛰기는 신체 활동을 통해 건강을 증진하는 효과뿐만 아니라, 협동심과 순발력을 기르는 데에도 도움이 됩니다. 두 사람이 호흡을 맞춰 힘을 조절해야 널이 균형을 잃지 않고 높이 솟아오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공중으로 솟아오르며 느끼는 해방감과 경쾌한 움직임은 심리적인 스트레스를 해소하고 명절 분위기를 한층 고조시키는 역할을 했습니다. 오늘날 널뛰기는 여전히 명절 행사나 민속촌 등에서 재현되며 전통문화의 소중한 부분으로 전승되고 있습니다. 이는 단순히 과거의 놀이를 답습하는 것을 넘어, 선조들의 삶의 애환과 지혜가 담긴 문화적 유산을 현시대에 계승하고 발전시키는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널뛰기는 우리 조상들의 삶과 지혜가 담긴, 살아 숨 쉬는 역사 한국 민속학 자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더위팔기: 지혜로운 선조들의 여름나기 비법과 주술적 염원

    더위팔기는 단순히 더위를 파는 행위를 넘어, 여름철 농사일의 고단함을 덜고 건강하게 여름을 보내고자 했던 선조들의 간절한 염원과 지혜가 담긴 독특한 한국 민속학 속 세시풍속입니다. 무더운 여름 뙤약볕 아래서 힘겨운 농사일을 해야 했던 농부들에게 더위는 그야말로 극복해야 할 고난이었습니다. 더위팔기는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도 삶의 의지를 잃지 않고, 나아가 이를 극복하려는 주술적인 믿음을 바탕으로 생겨났습니다. '더위를 사가라'는 말을 통해 마치 더위라는 존재를 실제로 사고파는 것처럼 상징화함으로써, 그해 여름 더위를 타지 않고 무사히 견딜 수 있으리라는 주술적인 믿음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이는 예방적 속인 행위로서, 개개인의 건강과 안녕을 기원하는 간절한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더위팔기는 특히 정월 대보름날 아침에 행해지던 중요한 세시풍속이었습니다. 해가 뜨기 전 일찍 일어나 이웃집을 찾아가 가장 먼저 만나는 사람에게 자신의 더위를 파는 방식입니다. 먼저 상대방의 이름을 부르며 "먼저 더위" 또는 "네 더위 사가게"라고 외치는데, 이때 상대방이 멋모르고 "누구야" 혹은 "예"라고 대답하면 그 해 더위는 상대방이 모두 가져가고, 외친 사람은 더위를 타지 않는다고 믿었습니다. 반대로 상대방이 대답하지 않고 "먼저 더위"라고 반문하면, 오히려 처음에 더위를 팔려던 사람이 더위를 사게 되어 그 해 더위를 먹게 된다고 합니다. 이처럼 더위팔기는 단순히 재미있는 놀이를 넘어, 말을 통해 영적인 힘을 믿고 더위를 예방하려 했던 선조들의 독특한 세계관을 보여줍니다. 이러한 풍속은 일찍 일어나 농사일을 시작하라는 생활의 자극제로도 작용했으며, 공동체 구성원 간의 소통과 유대를 강화하는 역할도 수행했습니다.

    더위팔기 외에도 유사한 형태로 '모기 팔기'가 마을 단위로 이루어지기도 했습니다. 여름철 사람들을 괴롭히던 모기를 퇴치하려는 염원이 담긴 풍속으로, 역시 주술적인 믿음을 바탕으로 합니다. 집 앞에서 밤이나 호두를 던지면서 더위를 사가라는 노래를 부르는 방식도 있었는데, 이는 더위팔기가 다양한 형태로 변주되어 왔음을 보여줍니다. 더위팔기는 농경 사회에서 자연의 힘에 크게 의존했던 선조들이 자연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풍요로운 삶을 기원했던 마음이 담겨 있는 소중한 민속문화입니다. 이는 또한 한국 민속학의 공동체 구성원들이 서로의 건강과 안녕을 빌어주며 함께 어려움을 이겨내고자 했던 상부상조의 정신을 보여주는 예시이기도 합니다.

    오늘날 더위팔기는 과거처럼 널리 행해지지는 않지만, 여전히 일부 지역에서는 정월 대보름을 맞아 전통을 보존하려는 움직임 속에서 재현되고 있습니다. 이는 단순히 옛 풍속을 되살리는 것을 넘어, 더위라는 자연의 어려움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지혜롭게 삶을 영위하고자 했던 우리 선조들의 정신을 기리고 계승하는 의미를 지닙니다. 더위팔기는 우리 민족의 생활 습관과 사고방식, 그리고 공동체 문화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하며, 현대 사회에서도 자연과의 조화를 추구하고 건강한 삶을 염원하는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이처럼 더위팔기는 단순한 놀이를 넘어, 선조들의 삶의 지혜와 자연관, 그리고 공동체 의식이 응축된 우리 문화유산의 한 단면을 보여줍니다.


    씨름: 민족의 힘과 단결을 상징하는 역동의 스포츠

    씨름은 예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한국 민속학으로 본 우리나라의 가장 대표적인 전통 기예이자 스포츠입니다. 두 사람이 샅바나 띠를 둘러 서로 잡고 힘과 기술을 겨루어 상대방을 넘어뜨려 무릎 이상의 신체 부위가 땅에 닿게 하거나, 경기장 밖으로 밀어내어 승부를 가리는 놀이입니다. 특히 단오절의 대표적인 남성적 놀이로, 그네뛰기와 함께 우리 민족의 명절 문화를 풍성하게 해 온 중요한 요소입니다. 농경 시대에는 씨름이 단순히 힘을 겨루는 놀이를 넘어, 제례 행사나 자기를 보호하는 무술의 한 형태로도 행해졌습니다. 이는 씨름이 개인의 기량을 넘어 공동체의 안녕과 번영을 기원하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씨름의 역사는 고대로 거슬러 올라가며, 조선 초 궁중과 양반들 사이에서 인기를 누렸습니다. 그러나 조선 중기 이후 씨름이 금지되면서 일시적으로 침체기를 겪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조선 말기에 이르러 씨름은 농한기에 백성들의 피로를 풀고 슬픔을 달래는 민중의 놀이로 다시금 발전했습니다. 지역 공동체의 민속 행사로 자리매김하며 우리 국민의 삶 속에 깊숙이 뿌리내리게 된 것입니다. 몽골의 '부하(Bu)'처럼, 씨름은 단순한 경기를 넘어 축제와 제전의 중요한 부분으로, 힘과 단결을 상징하는 민족적 정체성의 한 부분이 되었습니다. 넓은 모래사장이나 모래판에서 펼쳐지는 씨름은 준비 자세부터 심판의 구령까지 체계적인 규칙 속에서 진행됩니다. 선수들은 거의 수평을 유지한 자세로 다리를 뻗어 자세를 잡고, 심판의 시작 신호와 함께 힘과 다양한 기술을 걸어 승부를 겨룹니다.

    씨름은 참가하는 연령대와 방식에 따라 여러 종류로 나뉘었습니다. 동네 장정들이 모여 힘자랑하던 동네 씨름은 특별한 경기장 없이 풀밭이나 모래밭에서 즐겼으며, 샅바 없이 허리띠나 바짓가랑이를 잡고 승부를 겨루는 형태였습니다. 백중이나 단오 때 마을의 힘센 장정들이 참가하여 최종 우승자를 가리던 상씨름은 우승자에게 '장사' 칭호와 함께 황소를 상으로 주는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 황소를 탄 장사가 농악대와 함께 마을을 돌며 축제를 벌이는 모습은 씨름이 단순히 개인의 승리를 넘어 마을 공동체 전체의 기쁨과 단결을 상징했음을 보여줍니다. 12세 이상의 소년들을 중심으로 펼쳐지던 총각 씨름은 1등부터 5등까지 상품을 주며 젊은 세대에게 씨름을 계승시키는 역할을 했습니다. 아이들끼리 샅바 없이 하는 아기 씨름은 연속해서 세 아이를 물리치면 엿이나 문구류 등의 상품을 받는 등 놀이를 통해 자연스럽게 공동체 의식을 함양했습니다. 또한 추석 명절 전후에 아랫마을과 윗마을이 편을 나누어 겨루던 편씨름은 이기는 마을에 풍년이 들고 지는 마을에 흉년이 든다는 주술적인 믿음이 더해져 더욱 열띤 승부가 펼쳐졌습니다.

    씨름의 기술은 크게 왼씨름, 오른씨름, 띠씨름으로 분류됩니다. 왼씨름은 오른 다리에 샅바를 걸고 오른손으로 상대 허리샅바를, 왼손으로 상대 왼쪽 다리에 건 샅바를 잡는 일반적인 형태입니다. 오른씨름은 왼씨름과 반대로 왼 다리에 샅바를 걸고 왼손으로 상대 허리샅바를, 오른손으로 상대 오른쪽 다리에 건 샅바를 잡는 방식으로, 주로 경기도와 전라도에서 행해졌습니다. 띠씨름은 허리에 띠를 매고 그 띠를 잡고 겨루는 형태로 충청도 지역에서 많이 볼 수 있었습니다. 1931년 제2회 전조선 씨름대회 이후 왼씨름으로 통일되면서 씨름 기술의 표준화가 이루어졌습니다. 옛날에는 '지워내기'라는 독특한 대전 방식을 사용했는데, 이긴 사람이 계속해서 다음 상대와 싸우는 방식으로 연령, 체급, 실력 차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자연스럽게 조절되어 씨름을 '대동놀이'로 분류하는 근거가 되기도 했습니다. 씨름은 샅바 매는 법부터 시작하여 손기술, 다리(발)기술, 허리기술, 그리고 이들을 조합한 혼합기술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기술들이 존재합니다. 1984년에는 대한 씨름연합회에서 한글학회의 인준을 거쳐 54가지 씨름 기술을 확정하기도 했습니다. 씨름은 단순한 힘겨루기가 아니라, 상대의 힘을 역이용하고 자신의 힘을 더해 중심을 무너뜨리는 고도의 전략과 심신 단련이 필요한 역동적인 우리의 자랑스러운 전통 놀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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