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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 민속학에서 본 궁중음식의 역사와 의미
    한국민속학 2025. 5. 2. 15:04

    목차

    # 전국 진상 제도를 통해 본 궁중음식의 시작

    # 진상, 전국의 진미가 궁중으로 – 한국민속학에서 본 물선진상의 기록

    #기록으로 본 궁중음식의 체계화 – 한국민속학 속 조선의 문헌들

    # 궁중의 맛, 사라진 감각을 유추하다 – 한국민속학이 말하는 음식의 기억

    한국 민속학에서 본 궁중음식의 역사와 의미
    한국 민속학에서 본 궁중음식의 역사와 의미

     

     

    전국 진상 제도를 통해 본 궁중음식의 시작

    한국 민속학의 시각에서 바라보았을 때, 조선시대의 궁중음식은 단순한 ‘왕의 식사’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전국 팔도의 풍토와 백성들의 삶을 고스란히 담은 문화적 총체라 할 수 있다. 특히 궁중음식의 재료가 되는 식자재는 조선 왕조의 중앙집권 체제에서 정교하게 운영된 진상(振上) 제도를 통해 공급되었다. 진상이란, 각 지방에서 자랑할 만한 특산품이나 제철 식자재를 조정에 바치는 제도로, 그 품목은 지역에 따라 다양했고, 계절과 왕실의 중요 행사에 맞춰 정기적으로 이루어졌다. 건강한 식단은 좋은 재료에서 비롯된다는 인식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였고, 국가 차원에서 이를 관리하고 확보했다는 점은 조선의 궁중음식이 단지 사치의 산물이 아니라 체계적인 민속 식문화의 일부였음을 말해준다.

    조선 후기 기록에 따르면, 진상은 평안도를 제외한 거의 모든 지방에서 이루어졌으며, 경기, 충청, 전라, 경상, 강원, 서해, 함경, 제주 등 전국 각지에서 왕실의 수라상을 위해 최상급 재료를 진상했다. 특히 설날, 단오, 추석과 같은 주요 명절이나 왕실 가족의 생일처럼 국가적으로 의미 있는 날에는 더욱 다양하고 귀한 재료들이 궁궐로 모여들었다. 진상품의 품목과 진상 시기는 지방별로 차이가 있었지만 매달 한 차례씩, 또는 특정 시기에 집중적으로 이뤄졌다.

    그러나 조선시대는 지금처럼 내륙 교통이나 냉장 시설이 발달한 사회가 아니었기에, 지방에서 서울까지의 장거리 운송은 매우 힘든 일이었다. 특히 고기나 해산물과 같은 부패하기 쉬운 식재료는 경기나 충청처럼 궁궐과 가까운 지역에서만 생물로 진상할 수 있었으며, 먼 지방에서는 생선이나 조개류를 말리거나 젓갈로 가공하여 올리는 방법이 사용되었다. 때로는 신선도를 유지하기 위해 얼음을 사용하기도 했으며, 이는 조선 시대의 식품 보존법 및 물류 민속학적 측면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진상은 임금에게 바치는 예물이자 일종의 국가 세금으로 간주하였기 때문에, 각 고을의 백성들에게는 큰 부담으로 작용했다. 일정한 시기에 맞춰 지정된 품목을 준비해야 했고, 천재지변이나 흉작이 발생하더라도 그 의무가 면제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왕은 때때로 가뭄, 태풍, 홍수 같은 자연재해가 발생했을 경우 진상 시기를 조정하거나 면제하기도 했고, 이는 단순한 정치적 배려를 넘어 왕과 백성 간의 관계를 상징하는 상호 소통의 장치로 작용하였다.

    이처럼 백성들이 힘들게 준비한 특산물은 궁궐에서 철저한 검수 과정을 거쳐 조리되었고, 그렇게 완성된 음식은 임금의 수라상에 올랐다. 이 수라상은 단순히 왕의 식사라기보다는 전국 각지의 민속과 생산력을 한데 모은 상징물로 기능하였으며, 임금은 그 위에 차려진 음식만으로도 각 지방의 풍요와 빈곤, 백성들의 삶을 간접적으로 엿볼 수 있었다. 결국 궁중음식은 단순한 미식의 영역이 아니라, 조선 왕조의 행정체계, 백성들의 생업, 지역의 특산, 그리고 그 모든 것이 어우러진 민속학적 자산으로 간주할 수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궁중음식은 단순한 음식문화가 아니라, 한국 민속학이 주목해야 할 국가적 민속문화의 정수라 하겠다.


     

    진상, 전국의 진미가 궁중으로 – 한국민속학에서 본 물선진상의 기록

     

    조선시대 궁중음식의 중요한 뿌리 중 하나는 전국 각지에서 궁궐로 올려지던 ‘진상(振上)’ 제도였다. 이는 단순한 공납의 개념을 넘어서 각 지역의 풍토와 민속문화, 그리고 산업과 특산물의 집약체로 기능했던 시스템이었다. 진상은 조정이 각 도에 명하여 정해진 식재료나 특산품을 왕실에 올리게 한 것으로, 특히 왕실의 일상 식사와 의례 음식에 사용되는 식자재를 따로 구분해 ‘물선진상(物膳進上)’이라고 불렀다. 이 제도는 단순히 음식을 올리는 수준이 아니라, 지역의 자연생산물, 계절 흐름, 민속적 식생활 양식이 왕실로 옮겨지는 민속학적으로도 매우 의미 있는 문화적 흐름이라 할 수 있다.

    이 진상 제도는 조선 후기 들어 더욱 체계화되었으며, 특히 평안도는 군사·외교적 사정으로 인해 진상에서 제외되었고, 나머지 아홉 지역—경기, 충청, 전라, 경상, 강원, 서해, 함경, 개성, 제주—이 각각 고유한 특산품을 올렸다. 지역별로 진상 품목은 상이했으며, 진상 횟수는 한 달에 한두 차례, 혹은 두 달에 한 번 등 다양했지만, 왕실 어른의 탄생일이나 명절, 절기에는 추가로 더 많은 품목이 올려지기도 했다. 이러한 진상의 수송은 관찰사, 병마절도사, 수군 절제사와 같은 고위 관료들이 총괄하였고, 역로(歷路) 또는 **수로(水路)**을 통해 궁궐까지 운반되었다.

    역사적으로 이 진상 제도는 단지 식자재를 조달하는 행정 체계일 뿐만 아니라, 그 지역의 민속생활사와 연계된 문화자료로 가치가 크다. 실제로 조선 후기의 중요한 문헌인 **『진상별단등록(進上別單謄錄)』 (1728, 영조 대)**와 **『공선정례(供膳定例)』 (1776, 정조대)**에 보면 지역별 진상품의 구체적인 품목과 시기 등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예를 들어 함경도는 가자미, 광어, 대구, 빙어, 연어, 황어, 문어 등 다양한 어류와 해산물을 비롯해 꿩, 노루, 돼지 등 육류도 진상했다. 이와 달리 황해도는 숭어, 은어, 조기, 새우, 전복, 다양한 곡물과 과일류까지 포함된 복합 진상 지역이었다.

    강원도는 차가운 물살에서 잡히는 광어, 대구, 송어, 연어 등 냉수 어종과 더불어 송이, 꿀, 잣 등 산림자원이 중심이었고, 경기도는 마치 민속시장처럼 해산물부터 곡물, 과일, 나물류, 심지어 머루·다래·살구·참외 등 다채로운 품목군을 갖추어 왕도(王都) 인접지로서의 풍부함을 보여주었다. 충청도는 조기와 전복, 송이, 홍시 등 상대적으로 소수 품목이었지만 질 높은 재료로 구성되었고, 경상도는 가오리, 과메기, 전복, 해삼, 표고, 유자, 밤, 호두 등 해양성과 산림 성을 모두 지닌 복합 생태 진 상자였다.

    전라도 또한 은어, 조기, 오징어, 전복, 홍시, 곶감, 호두 등 해산물과 과일류, 약재 성분이 포함된 식재료를 진상하며 남도 특유의 풍요로움과 절기 식문화를 보여주었다. 마지막으로 제주도는 감자, 전복, 표고, 귤 등 섬 특유의 자원과 기후 특성을 반영한 식자재로 진상의 일익을 담당하였다.

    이처럼 진상된 식재료 하나하나는 단순한 음식 재료가 아니라 한국 민속학의 지역 민속 자원이자 지방과 중앙을 연결하는 정치적 상징물이었다. 각 지역에서 진상한 품목들을 통해 조선 후기의 식생활 패턴, 지역 자원 분포, 계절 민속, 그리고 민중의 생활사가 반영되었다는 점은 우리가 궁중음식을 통해 단순히 왕의 식사만이 아닌 국가 전체의 민속적 생태계를 읽을 수 있는 귀중한 자료임을 말해준다.


    기록으로 본 궁중음식의 체계화 – 한국민속학 속 조선의 문헌들

     

    조선왕조에서 궁중음식은 단순히 왕의 식탁을 차리는 일이 아니라, 국가 운영과 백성의 삶, 지역 경제와 문화가 유기적으로 얽힌 시스템이었다. 이러한 궁중음식의 흐름은 다양한 사료를 통해 체계적으로 기록되었고, 이는 오늘날 한국 민속학에서 매우 중요한 사료로 활용되고 있다. 대표적으로 《만기요람(萬機要覽)》, 《진상등록(進上謄錄)》, 《공선정례(貢膳定例)》, 그리고 지역별 진상 보고서나 화첩 자료들은 조선 후기 궁중음식의 조직화한 구조와 지역 민속의 연결고리를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들이다.

    우선 《만기요람》은 1808년(순조 8년) 국왕의 명에 따라 심상규와 서양보다 편찬한 자료로, 국왕이 정사를 총괄하기 위해 필요한 다양한 행정 정보가 담긴 책이다. 이 가운데 **재용편(財用篇)**과 **군정편(軍政篇)**에는 왕실과 관련된 재정과 군사 자료 외에도 각 전각(殿閣)과 궁에서 사용된 식재료의 종류와 수량이 시기별로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어, 당시 궁중음식의 규모와 체계, 계절별 차이 등을 이해하는 데 매우 유용하다. 특히 혜경궁, 가순 궁 등 각 궁전별로 구분하여 기록함으로써 궁중 내 공간별 식문화의 차이도 엿볼 수 있다.

    《진상등록》은 1707년부터 1757년까지 50년에 걸친 일부 기록이 남아 있으며, 각 궁과 종묘 등에 진상된 물품을 날짜순으로 기록한 문서다. 이 자료에는 단순히 물품의 목록뿐 아니라, 감량 사유, 변동 명세, 진상 방법의 결정 과정, 품질 불량에 대한 논의, 상납 연기 등의 행정적 논의까지 담겨 있어 진상이 단순한 전달 과정이 아닌 고도의 행정 행위였음을 보여주는 민속 행정 사적 자료로서 가치가 크다. 이를 통해 조선 후기 각 지방의 특산물 분포, 지방-중앙의 물자 유통 구조, 그리고 관료 조직 내에서의 물품 관리 방식 등을 종합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

    정조대에 간행된 《공선정례》는 특히 민속학적 측면에서 주목할 만하다. 정조는 재위 초기인 1776년, 시대의 변화에 따라 지역별 생산품이 달라졌고, 불필요한 진상으로 인한 혼선이 많아졌다는 문제의식을 가졌다. 이에 따라 진상품의 품목과 수량을 합리적으로 재조정하고자 《공선정례지》를 편찬하게 된다. 이 문서는 진상품의 개정 이유, 절차, 계절 진상(천신), 초하루 진상(삯에선)의 기준, 그리고 진상 물품의 종류와 수량을 구체적으로 규정했다. 이 규정은 갓 진상치, 즉 관아와 대전, 왕비 대전 등으로 구분하여 체계적으로 제시되었으며, 국가 차원의 음식문화 관리체계가 정립되었음을 의미한다. 《공선정례》는 오늘날 한국 민속학에서 조선의 제도적 식문화 연구에 핵심 사료로 활용되고 있다.

    그 외에도 구체적이고 생생한 지역 기록들이 다수 존재한다. 예컨대 정조 연간의 어느 해에 충청도에서 진상된 전복 기록은 ‘각삭진상등록(刻削進上謄錄)’이라는 이름으로 남아 있으며, 대전, 왕대비전, 혜경궁, 중궁전 등 각 전각에 얼마만큼의 전복을 담은 포대를 보냈는지, 그리고 연중 어느 시점에 어떤 지역에서 진상하였는지가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은 단지 전복 수량을 알 수 있는 것을 넘어, 왕실 의례의 주기, 각 전각의 역할, 지역별 진상 주체 등을 확인할 수 있는 구조적 자료다.

    또한 조선 후기 강원도 지역의 통천군, 고성군 등이 **철종 6년(1855년)**에 관찰사에게 보고한 진상품 문서는 지방 행정의 실제 운영 상황을 보여준다. 이 문서들에는 동지 진상이나 초하루 진상 명령을 받은 후 생은어, 연어알젓, 생대구, 반건조 대구 등을 엄선하고 포장하여 올린 경위가 담겨 있으며, 진상의 절차와 중요성을 강조하는 표현들이 눈에 띈다. 이는 당시 진상이 단순한 통보가 아니라 공적인 의무이자 명예로운 봉공 행위로 인식되었음을 나타낸다.

    이러한 기록물 외에도 시각적 자료인 《탐라순력도》 속는 진상 문화를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매우 흥미로운 민속자료다. 숙종 28년(1702년) 제주목사 이 형상이 제주도를 순찰하며 기록한 이 화첩은 제주도의 일상과 공무를 보여주는 총 41점의 그림으로 구성되었는데, 그 중 는 제주에서 귤을 진상하는 과정을 묘사하고 있다. 감귤을 차양이 처진 상자에 담아 포장하고, 이를 관군이 지키는 가운데 진상하는 장면은, 귤이라는 한 가지 식재료조차 국가적으로 얼마나 중요한 민속적·정치적 상징이었는지를 보여준다. 그림 아래에는 실제 귤의 종류와 수량까지 기재되어 있어 시각과 문헌의 결합이라는 점에서 귀중한 한국 민속학 사료로 평가받는다.

    이처럼 조선 후기 궁중음식과 진상 체계는 다양한 문헌과 시각 자료를 통해 그 복잡성과 정교함을 오늘날에도 생생히 전해주고 있다. 이는 단지 왕실의 식문화를 넘어서 **조선 사회 전체의 민속적 흐름과 정치적 질서, 경제적 기반을 통합적이로 반영한 ‘문화 시스템’**으로 이해할 수 있으며, 한국 민속학에서는 이를 국가 제 의식의 일환이자 민중과 왕실을 잇는 상징적 통로로 해석하고 있다.


     

     궁중의 맛, 사라진 감각을 유추하다 – 한국민속학이 말하는 음식의 기억

     

    궁중음식은 무엇으로 맛을 냈을까? 이 단순하면서도 본질적인 질문은 한국 민속학에서 매우 복합적인 의미를 지닌다.
    궁중음식은 단지 고급 재료로 장만이 된 미식의 정점이 아니라, 조선 왕조의 정치 이념, 사회 질서, 의례 구조, 미각 문화가 모두 응축된 역사적 산물이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궁중의 ‘맛’**은거의 남아 있지 않다. 왜냐하면 왕실의 일상식에 대한 기록은 거의 없고, 남아 있는 기록들 또한 대부분이 형식적인 의례 음식에 국한되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의 궁중음식은 그 목적과 상황에 따라 크게 다섯 가지로 구분된다. 첫째는 종묘에 천신(薦新)하는 길례의 제사 음식, 둘째는 왕실의 장례에서 쓰이는 상례 음식, 셋째는 왕실 경사(세자 책봉, 왕실 탄일 등)나 혼례 등에서 제공되는 연회색, 넷째는 사신 접대를 위한 비례 음식, 마지막으로 왕과 왕비 등 왕실 가족이 일상적으로 먹는 수라 등이다. 이 중에서 의례적 목적이 강한 제례 음식은 맛보다는 ‘상징성’과 ‘정결함’이 강조되었기에 실제 조리 방식이나 양념의 사용은 제한적이었다. 천신 음식은 자연의 첫 수확물을 신에게 올리는 행위로, 인간의 욕망이 개입된 조리나 맛을 가미하기보다는 순수한 재료 자체를 존중하는 형식이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처럼 ‘맛’을 강조하는 음식—즉 연회색, 영접 식, 가례 식, 일상식 등—에 대한 기록은 조선시대에도 매우 드물다는 점이다. 『의궤(儀軌)』와 같은 문헌에는 의례의 절차와 음식의 명칭, 차림 순서, 수량은 비교적 상세하게 나와 있으나, 조리 방법이나 양념의 구체적 사용, 또는 음식 간의 궁중 내 ‘맛 조화’에 대한 언급은 거의 없다. 이는 조선시대 기록물들이 행정 중심의 목적을 가졌기 때문에, 맛이나 미각에 대한 묘사보다 절차와 형식을 더 중요시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오늘날 궁중음식의 맛은 오롯이 기록만으로는 되살릴 수 없는, ‘사라진 감각’으로 남아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궁중음식의 맛을 어떻게 복원할 수 있을까?
    여기서 중요한 것은 동시대의 고조리서들이다. 『음식디미방』, 『산가여록』, 『수운잡방』,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 등은 왕실 음식을 직접 기록한 문헌은 아니지만, 당시 조선 중상류층의 식생활과 조리법, 양념 사용 방식 등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어, 이를 통해 궁중음식이 어떤 재료와 방식으로 조리되었는지를 유추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장류(된장, 간장), 젓갈, 기름, 향신 재료(생강, 대추, 계피), 식초, 술 등이 각종 국물 음식과 전골류에 활용되었다는 점은 당시 미각의 기준을 알려준다. 특히 양념의 강도와 간의 균형에 대한 언급은 **궁중요리에서 ‘담백하고 조화로운 맛’**이 강조되었음을 보여준다.

    또한 왕실에 납품된 재료들을 분석하는 것도 중요한 단서다. 각 지방에서 진상된 고기류, 생선류, 해산물, 산채류, 곡물, 과일, 향신채 등은 지역의 민속 식문화가 궁중에 반영된 결과이며, 이들이 어떤 조합으로 조리되었는지 고찰하는 일은 궁중의 맛을 현대에 되살리는 민속학적 복원 작업이다. 특히 계절에 따른 식재료의 변화, 지역의 특산물 수급, 저장 방식 등은 지금의 재현 요리와 비교할 수 없는 풍미와 의미를 담고 있었을 것이다. 더구나 냉장 기술이 없던 시절, 젓갈, 말린 해산물, 숙성장 등을 이용한 저장 방식은 **단순한 보존 기술이 아니라 ‘맛을 구성하는 미각 민속’**이기도 했다.

    그러나 아무리 많은 문헌과 자료가 있다고 하더라도, 당시의 기후, 재료의 품질, 수급 방식, 조리도구, 조리 시간, 식습관 등은 현재와 완전히 다르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가 재현하는 궁중요리는 어디까지나 가장 근접한 추정일 뿐이다. 하지만 한국 민속학에서는 이 같은 ‘재현’의 한계를 인정하면서도, 남아 있는 조각들을 바탕으로 그 시대 사람들이 느꼈을 맛, 그 음식에 담긴 의미, 조리와 섭생의 전통을 되살리는 데 깊은 의미를 두고 있다.

    즉, 궁중음식의 맛은 단순한 감각의 문제가 아니라, 기록과 기억, 민속과 제도의 틈 사이에서 복원해야 할 문화의 한 조각이다. 그것은 오늘날 한식 세계화와 궁중요리 계승의 관점에서도, 민속학적 분석 없이는 온전히 전달될 수 없는 지점이기도 하다. 우리는 잊힌 미각 속에서 조선의 궁중을 떠올리고, 그 한 점 한 점의 음식에 담긴 한국 민속학적 정서를 되새겨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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